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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성군 (왕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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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보성군 이합은 조선 태종의 손자이자 효령대군의 셋째 아들로, 1416년에 태어나 1499년에 사망한 왕족이다. 1441년 보성군에 봉해졌으며, 세조 때 무관으로 활동하며 공을 세웠다. 예종 즉위 초 남이와의 친분으로 위기를 겪었으나, 이후 정1품 현록대부까지 올랐다. 슬하에 7남 6녀를 두었으며, 그중 딸이 갑자사화의 주역 임사홍에게 출가하여 가문의 명예가 실추되는 결과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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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성군 (왕족)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합(李㝓)
작위
출생일1416년
출생지조선 한성부
사망일1499년 9월 1일(음력)
사망 원인노환 (병사)
사망지조선 한성부
매장지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면 광전리
거주지조선
국적조선
배우자합천 이씨
부모효령대군, 예성부부인 정씨
왕가 관계
증조할아버지태조 이단
할아버지태종 이방원
고모정순공주
경정공주
경안공주
정선공주
큰아버지양녕대군
작은아버지세종
성녕대군
사촌누나정소공주
사촌형문종
사촌누나정의공주
사촌동생세조
안평대군
임영대군
광평대군
금성대군
평원대군
영응대군
5촌 조카경혜공주
단종
덕종
귀성군
예종
군 경력
최종 계급좌상대장
복무조선 육군
복무 기간? ~ 1468년
기타 정보
웹사이트효령대군 묘소 청권사

2. 생애

보성군 이합은 1416년(태종 16년) 효령대군 이보와 해주 정씨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1441년(세종 23년) 보성군으로 봉해졌고, 이후 여러 관직을 거치며 1489년(성종 20년) 정1품 흥록대부에 올랐다.

1457년(세조 3년) 단종이 사망하자 대전관을 맡았고, 보성경으로 승작되었다. 세조 때에는 무관으로 활동하며 도진무, 해청위, 선전관, 좌상대장 등으로 공헌하였다. 1467년 다시 보성군에 책봉되었고 1468년 좌상대장이 되었다.[1] 그러나 예종 즉위 초 남이와의 친분 관계로 인해 위기를 겪었다. 1468년 남이가 처형될 때, 그와 교분이 두터웠다는 이유로 아들 춘양군과 함께 군호를 삭탈당하고 유배되었다. 이때의 고초는 보성군에게 평생의 후유증으로 남았다.[1]

1469년 예종이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보성군은 유배에서 풀려나 복직되었다. 1489년(성종 20년)에는 양로연에 참여한 후 흥록보성군에 올랐다.[1] 1499년(연산군 6년) 정1품 현록대부를 받고 같은 해 9월 1일 84세로 사망했다. 임종 시 시호와 예장을 받지 않겠다는 유언을 남겼다.[1]

1503년(연산군 10년), 왕은 이미 사망한 보성군을 기려 그의 손자 강양정 견손에게 당상관을 제수하였다. 보성군은 딸을 간신 임사홍에게 시집보냈는데, 임사홍이 유자광과 함께 갑자사화를 일으키고 1506년 중종반정으로 처형당하면서 가문의 명예가 실추되었다.[2]

2. 1. 생애 초반

1416년(태종 16년) 효령대군 이보(李補)와 증 좌의정 정역(鄭易)의 딸 예성부부인 해주정씨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이름은 합(㝓)이다. 부인은 청풍군부인(淸風郡夫人) 인천 이씨(仁川李氏)로 광록시(光祿寺) 소경(少卿)을 지낸 이무창(李茂昌)의 딸이다.

1441년(세종23) 보성군으로 봉해졌고 종2품 가정대부(嘉靖大夫), 1443년(세종25) 정2품 숭덕대부(崇德大夫), 1444년(세종26) 정2품 숭헌대부(崇憲大夫), 1489년 (성종 20) 정1품 흥록대부(興綠大夫)로 승진하였다.

2. 2. 관료 생활

1457년(세조 3) 단종이 죽자 대전관(代奠官)을 맡았고, 보성경(寶城卿)으로 승작되었으며 1466년 해청위(海靑衛)가 되었다.[1]

세조 때에는 무관으로 활동하여 도진무(都鎭撫), 해청위(海靑衛), 선전관(宣傳官), 좌상대장(左廂大將) 등으로 공헌하였다.[1] 1467년 다시 보성군에 책봉되었으며 1468년 좌상대장이 되었다.[1] 그러나 예종 즉위 초 남이와의 친분관계로 위기를 겪었다.[1]

1468년 남이를 국문하던 중 평소에 그와 교분이 두터웠던 사실이 드러나 아들 춘양군(春陽君) 내(徠)와 함께 군호(君號)를 삭탈당하고 유배되었다.[1] 이때 겪었던 고초의 후유증이 보성군에게 평생을 갔다고 전해진다.[1] 남이태종원경왕후의 외증손(外曾孫)이자 넷째 딸인 정선공주(貞善公主)의 손자였다.[1]

유자광은 "백두산의 돌을 칼 갈아 없애고(白頭山石磨刀盡)/두만강의 물은 말 먹여 없애니(豆滿江水飮馬無)/남아 이십에 나라를 평안케 못하면(男兒二十未平國)/후세에 누가 대장부라 부르리오(後世誰稱大丈夫)"라는 시에서 "男兒二十未平國"을 "男兒二十未得國"이라 고쳐 모함하여, 25세에 공조판서와 병조판서를 역임하였던 남이1468년(예종 1년) 11월 2일 26세의 나이에 거열형(車裂刑)으로 참살하였다.[1]

2. 3. 생애 후반

1469년 예종의 급서로 위기를 모면하고 풀려나 임명장을 돌려받고 과거의 관직으로 복직되었다. 1489년(성종 20)에는 고령으로 83명의 노인에게 베푼 양로연(養老宴)을 받은 후 특별히 벼슬을 받아 흥록보성군(興祿寶城君)에 올랐다.[1] 1499년(연산군 6년)에는 종친의 최고 품계인 정1품 현록대부(顯綠大夫)를 받고 같은 해 9월 1일 8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1]

임종 시 '시호와 예장을 받지 않겠다'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1] 왕의 특명으로 묘비는 "조선국 왕손 현록대부 보성군 지묘"라고 새겨졌다.[1] 슬하에는 7남(신풍도정, 율원군, 춘양군, 평성군, 물거 군, 원산군, 동양정)과 6녀를 두었다.[1] 묘소는 처음 장례를 지낸 지금의 금천구 박달골 오좌에 안장되었다가 1941년 6월 11일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면 광전리 미좌로 옮겨졌다.[1] 영정을 모시는 재실은 묵수재(默守齋)이며, 보청재(寶淸齋)이다.[1]

1503년(연산군 10)에는 왕이 이미 세상을 떠난 군을 생각하여 손자 강양정(江陽正) 견손(堅孫)에게 보성군을 대신하여 당상관(堂上官)을 제수하였다.

딸을 간신 임사홍에게 출가시켜 탄식 속에 살았는데, 유자광과 한 무리로 날뛰는 것을 지켜보면서 끝내 눈을 감았다.[2] 결국 갑자사화를 일으켜 1506년 중종반정이 일어나자 사위 임사홍이 추살(推殺)되고 이어 부관참시(剖棺斬屍)되는 결과를 가져와 가문의 명예가 실추되었다.[2]

3. 가족 관계

신풍도정
아들/딸안정부정 이균(安定副正 李畇)한양 조씨 정랑 조영석(趙永錫)에게 출가전주 류씨 현감 류진(柳軫)에게 출가안동 김씨 정국공신 영안군 김수경(金壽卿)에게 출가차남
율원군
아들/딸여양군 이자겸(呂陽君 李子謙)전주 최씨 부장 최임(崔任)에게 출가3남
춘양군
아들/딸임강부정 준(臨江副正 畯)벽진 이씨 참군 증 찬성 이승언(李承彦)에게 출가의령 남씨 승지 남흔(南忻)에게 출가귀인 남씨의 친정아버지평양 조씨 판관 조수함(趙守諴)에게 출가여흥 민씨 민만통(閔晚通)에게 출가밀양 박씨 사지 박억년(朴億年)에게 출가3남
춘양군
서자 | 견성부정 이린(甄城副守 李疄)4남
평성군
아들/딸주계군 이심원(朱溪君 李深源)예성군 이준원(芮城君 李濬源)이혼원(李混源)선곡부정 이윤원(善谷副正 李潤源)의신군 이징원(義新君 李澄源)1492 ~ ?원주 변씨 첨지 원효공(邊孝恭)에게 출가순창 설씨 설충란(薛忠蘭)에게 출가창녕 성씨 직장 성회(成誨)에게 출가남원 윤씨 첨사 윤취(尹就)에게 출가봉사 여흥문(呂興文)에게 출가이업(李業)서손자 | rowspan="2" | 4남
평성군
서자영의수 이청원(永儀守 李淸源)사천군 이호원(泗川君 李浩源)1475 ~ ?5남
물거군
아들고안도정 이정(高安副正 李精)양녹부정 이수(楊麓副正 李粹)6남
원산군
아들 | 장림수 이순민7남
동양정
아들/딸강성도정 이견손(江城副正 李堅孫)김극강(金克剛)에게 출가원주 원씨 원세응(元世應)에게 출가순흥 안씨 안찬(安璨)에게 출가장녀
사위
윤지곤
아들 | 부장(部將) 윤진손(尹震孫)외손자 | rowspan="3" | 차녀
사위
김극동
아들/딸김천추(金千秋)청주 한씨 군수 김세보(韓世俌)에게 출가이송수(李松壽)에게 출가외손자 | rowspan="6" | 3녀
사위
임사홍
아들/딸풍천위 임광재(豊川尉 任光載)? ~ 1495, 예종의 장녀 현숙공주 부마임희재(任熙載)1472 ~ 1504임문재(任文載)풍원위 임숭재(豊原尉 任崇載)? ~ 1505, 성종의 3녀 휘숙옹주 부마교하 노씨 노사신의 손자 노종(盧種)에게 출가문성부정 이강(文城副正 李湘)에게 출가외손자 | rowspan="3" | 4녀
사위
신만년
아들/딸별좌(別坐) 신상은(申匡銀)신광석(申匡錫)강효정(姜孝貞)에게 출가서외손자 | rowspan="10" | 5녀(서녀)
사위
이사종
아들/딸현감(縣監) 이원(李晼)현감(縣監) 이교(李晈)이해(李晐)이방(李昉)이돈(李暾)이미(李楣)에게 출가김해 김씨 김종수(金終壽)에게 출가김신(金紳)에게 출가정계로(鄭繼老)에게 출가서외손자 | rowspan="6" | 6녀(서녀)
사위
송기손
아들/딸현감(縣監) 송준(宋駿)송숙(宋驌)현감(縣監) 송구(宋駒)참봉(參奉) 송화(宋驊)고령 신씨 신계(申洎)에게 출가화개령(花開令) 이택(李擇)에게 출가서외손자 | rowspan="4" | 7녀(서녀)
사위
류형원
아들/딸류황(柳滉)1452 ~ ?류양(柳瀁)1454 ~ ?류장(柳漳)1461 ~ ?여산 송씨 동지 송맹경(宋孟璟)에게 출가


4. 평가와 논란

보성군 이합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긍정적으로는 왕족으로서 겸손하고 신중하게 처신했다는 점이 꼽힌다. 학문을 좋아하고 검소하게 생활했으며, 궐내에서 말을 삼가는 등 처신에 신중을 기했다.[2] 어려운 백성을 돕는 데 힘썼다는 기록도 있다.[2]

4. 1. 부정적 평가

남이가 유자광의 모함으로 처형될 때, 보성군은 남이와 친분이 있었다는 이유로 아들 춘양군과 함께 군호를 삭탈당하고 유배되는 고초를 겪었다. 이 사건은 보성군에게 평생의 후유증을 남겼다.[2]

보성군은 딸을 간신 임사홍에게 시집보낸 것을 크게 탄식했다. 임사홍은 유자광과 함께 갑자사화를 일으키는 등 전횡을 일삼았고, 결국 1506년 중종반정으로 인해 처형되고 부관참시까지 당했다. 이로 인해 보성군 가문의 명예는 크게 실추되었다.[2]

5. 전해오는 이야기

보성군 이합과 관련되어 전해오는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5. 1. 남이와의 인연

1468년 장군 남이를 국문하던 중 평소에 그와 교분이 두터웠던 사실이 드러나 아들 춘양군(春陽君) 내(徠)와 함께 군호(君號)를 삭탈당하고 유배되었다.[1] 이때 겪었던 고초의 후유증이 보성군에게 평생을 갔다고 전해진다.[1] 남이태종원경왕후의 외증손(外曾孫)이자 넷째 딸인 정선공주(貞善公主)의 손자로 알려져 있다.[1]

유자광은 "백두산의 돌을 칼 갈아 없애고(白頭山石磨刀盡)/두만강의 물은 말 먹여 없애니(豆滿江水飮馬無)/남아 이십에 나라를 평안케 못하면(男兒二十未平國)/후세에 누가 대장부라 부르리오(後世誰稱大丈夫)"라는 남이의 시에서 "男兒二十未平國(남아이십미평국)"을 "男兒二十未得國(남아이십미득국)"이라 고쳐 모함하였다.[1] 이로 인해 25세에 공조판서와 병조판서를 역임하였던 남이1468년(예종 1년) 11월 2일, 겨우 26세의 나이에 마차에 묶여 사지가 찢겨나가는 거열형(車裂刑)에 처해지는 참살을 겪었다.[1]

5. 2. 기타

1489년(성종 20) 고령으로 83명의 노인에게 베푼 양로연(養老宴)에 참석한 후 특별히 벼슬을 받아 흥록보성군(興祿寶城君)에 올랐다.[2] 1503년(연산군 10) 왕이 이미 세상을 떠난 보성군을 생각하여 손자 강양정(江陽正) 견손(堅孫)에게 보성군을 대신하여 당상관(堂上官)을 제수하였다.[2]

참조

[1] 웹사이트 효령대군 파종회 청권사 http://www.hyor.or.k[...] 2014-05-02
[2] 웹사이트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http://people.aks.ac[...] 2016-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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